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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전후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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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파 시오니스트들과 유대인 지도자들의 오류 == >....시오니스트에게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역사는 영웅도 정복자도 지배자도 행동하는 인간도 없는, 울며불며 자비를 구걸해온 비겁한 역사였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찾아온 홀로코스트 생존자들도 짊어지기 싫은 부담스러운 짐이었다. > >시오니스트가 보기에 홀로코스트 희생자, 생존자는 이미 독일인이나 프랑스인으로 동화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온주의를 부정하고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를 거부한 민족의 배신자였다. 특히 생존자는 강제수용소 같은 끔찍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극도로 이기적 존재였다. > >시오니스트와 디아스포라의 권력 관계는 이스라엘의 민족시인이자 시오니스트인 이츠하크 사데의 시 "해변의 누이"에서 잘 드러난다. 시는 난민선을 타고 이제 막 팔레스타인 해변에 도착한 홀로코스트 생존자 소녀와 건장한 시오니스트 청년의 만남을 그린다. > >그의 눈에 비친 소녀는 "정말로 더럽고, 옷도 누더기처럼 헤져있고, 머리칼도 엉망으로 헝클어졌고, 신발도 신지 않은" 모습이다. 그리고 그는 이미 "알고 있다. 그녀의 살갗에는" 나치 장교를 상대하는 매춘부임을 의미하는 "장교 전용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음을." > >그와 마주선 소녀는 울면서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제가 정말 이 젊고 건강한 청년들이 목숨을 걸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아요... 저는 살아서는 안 돼요" > >시오니스트의 시 속에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이 소녀는 이렇게 자기 몸과 자기 자신을 배반하고 결국 자기 민족을 배반한 이중의 배반자로 재현된다. > >임지현, "기억전쟁" 휴머니스트, 2019, 110-111 >그러나 다른 한편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다. 적대적인 아랍인들과 투쟁하면서 동시에 황무지를 개간해야 했던 건국 초기 이스라엘 정치지도자들이 내세운 모범적 인간상은 "싸우면서 건설하는" "새로운 유대인" 이었다. 그들은 홀로코스트 기간을 포함한 디아스포라 시절의 유대인들을 강자에 대한 순응을 생활의 철칙으로 삼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 과 서비스업에 종사해 삶을 유지하는 "기생인간(Luftmensch)" 으로 규정했던 반면, 자신들을 포함하여 일찍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전쟁영웅"과 "생산적 선구자"로 묘사했다. >(중략) >침묵의 세번째 이유는 건국 직후의 사회분위기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이스라엘에 살고 있던 대부분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종전 후 몇 년에 걸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온 '이방인' 이었다. 이미 그곳에 정착해서 살았던 유대인들은 새로운 희망을 안고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해온 생존자들을 구시대의 '디아스포라 유대인' 이라고 냉대했다.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아직 수용소에서 길러진 근성을 버리지 못한 생존자들을 비사회적 인물이나 파렴치한으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 >-최호근,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기억과 역사 만들기 ([[http://pal.or.kr/xe/docu/77818|논문 링크]]) 당시 우파시오니스트들에게 홀로코스트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유대인 국가 건국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동시에 유대인들을 이주시킬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이게 최악으로 발현된 것이 어떤 것이냐면, 나치와 시오니즘 지도부가 협력관계를 구축한 사례들이다. 다만,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직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밝혀지기 이전이었으므로 유대인의 학살이 아닌 추방을 지지한 경우였다.[* 전에 있었던 서술의 반 이상은 [[네오나치]] 및 음모론 사이트 외에서는 찾을 수 없는 내용이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가급적 출처가 확실한 자료만 기재하길 바람.] 우선 1941년 1월 11일 이츠하크 샤미르는 '''시오니즘 군사조직 아르군과 독일 나치 사이의 군사협약'''을 제안한다. 이것은 위에 쓴 대로 나치의 목적이 유대인의 학살이 아닌 추방이라고 생각한 점도 있었지만, 이스라엘 건국의 가장 큰 걸림돌이 영국이라고 생각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팔레스타인 지방을 지배하고 있는 영국은 가장 큰 적이었고, 마침 영국과 적대적인 데다가 유대인들을 추방시키고 있다고 믿었던 나치는 자연스러운 동맹 대상이었다. >유럽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는 것은 유대국가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독일의 계획에 따라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것과 유대인의 진정한 민족적 열망 사이에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다. >- 이츠하크 샤미르 샤미르가 보낸 편지는 나치에게 영국령 팔레스타인에서의 이스라엘 독립 활동(게릴라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독일의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으로 추방하고 물자를 지원해 주면 이스라엘이 나치 독일의 우방이 될 것임을 명시했다. 나치는 이 편지를 무시했지만, 샤미르는 나중에 이스라엘의 7대 총리가 된다. 또한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은 전부가 죽는 것보다는 소수(특히 건강한 젊은이와 유명 인사)라도 살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나치와 협력했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도 엄청난 논란이 일어날 게 뻔한데, 이쪽은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킨 격이니 더욱 문제점이 크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일화로, 194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유대인 위원회 소속 카스트너는 나치의 [[아돌프 아이히만]]과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의 내용은 1,000여 명의 유대인을 살려주는 대가로 많은 돈을 지불한다. 이 부분만 놓고 보면 이게 왜 문제가 되나 싶지만, 카스트너는 나치로부터 이 '''정확히 1864명의 유대인을 살리는 대가로 대부분의 나머지 80여만 유대인들의 학살을 묵인했다. 즉, 유대인들에게 수용소로 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리지 않기로 한 것이다.''' 카스트너 자신부터가 유대인이었으므로 자기를 포함해서 모든 유대인들이 죽는 것보다는 일부라도 살리는 것이 나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카스트너 자신이 말하기로도 저명한 유대인들[* 특히 문제가 되는 점은 이런 분류를 1942년에 나치가 시작했다는 것이다.]과 젊고 건강하며 일을 하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43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죽도록 놔둔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나치에게 이 유대인들의 목숨값으로 지불하기로 한 돈을 조달하기 위해서 카스트너는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대인들 중 150여 명의 부자들에게 경매를 통해서 학살을 피할 수 있는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권리를 팔았고, 이 돈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협약의 내용이 알려지기 전에 카스트너는 이스라엘 정계에서 홀로코스트로부터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한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이 사실이 폭로되자 이스라엘의 법원에서 "악마의 계약을 체결한 죄로" 유죄를 선고받은 뒤 1957년 유대인 극단주의자에게 피살당한다. 비록 카스트너가 죽은 후에 상위 법원에서 그를 무죄로 고치긴 했지만, 이미 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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